2016년 6월 6일 월요일

<빌립보서 1:19-26> 기찬밤 설교 요약

<빌립보서 1:19-26>
인간은 같은 것을 보지만 자신의 다양한 생각과 관점으로 바라봅니다. 목사님께서는 예배 때 한 두가지의 유명한 그림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림을 어떻게 보면 천사가 보이고, 다르게 보면 악마가 보이는 그림. 한 사람이 있는 것 처럼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두 사람이 있는 것 같은 그림. 우리는 자신이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며 살아가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과연 우리는 삶에 있어서 올바르게 생각하고 있으며 올바른 방법으로 살고 있을까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내가 잘못 알고 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번 빌립보서 본문에서 나온 빌립보 성도들과 사도 바울의 관점의 차이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의 목숨이 걸린 재판을 앞두고 바울의 기도와 빌립보 성도들의 기도는 달랐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바울을 살려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도록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자신의 처한 상황과 상관없이 주님만 존귀하면 된다고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의 기도는 마치 우리들의 기도와 같습니다. 어려움이 처하면 주께 달려와 이 문제만 해결해주시면, 제가 더 나은 삶을 살게 해주시면 주님께 더 봉사하겠다고 칭얼대는 우리와 같습니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을 많이 본 의사들은 말합니다. 죽음을 앞에 둔 환자 가운데 가장 힘들게, 지저분하게 죽음을 맞이 하는 사람들은 기독교 인들이라고. 우리는 주님의 구원과 천국을 믿는데, 천국이 가까히 왔는데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나 조금만 더 살게 해주시면 조금만 더 살게 해주시면 더 많은 일 해보겠다고 기도하는 우리의 모습은 더 큰 계획을 보지 못하고 제대로된 믿음의 지식을 알지 못하는 빌립보 성도들과 같지는 않나 생각합니다. 그래도 사랑은 있었던 빌립보 성도들이 우리보다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도바울과 빌립보 성도, 사도바울의 삶과 우리의 삶. 그 차이는 하나님을 향한 바른 지식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진짜 천국과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복음에 대한 바른 지식도 그에 대한 확신도 없습니다. 세상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확신이 부족해서는 아닐까요? 하나님을 올바르게 정확히 알게되면 우리도 자신의 목숨 자체를 위해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이 그리스도와 공동체를 위한 방향으로 쓰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도바울과 같은 기도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참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가치보다 그 이후에 더 큰 가치가 있음을 알고 그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삶을 바로 볼 때 바울과 같이 기도하고 바울과 같이 행하길 원합니다. 비록 그 누구도 바울과 같이 쉽게 살 수 없습니다. 목회자도, 가진자도, 가난한 자도, 누구든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함께 계속 기도하며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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