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31일 목요일

합리적인 선택의 역설

합리적인 선택의 역설
  최근 경제학 관련 책을 읽다가 경제학자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를 발견했다. 자신의 한 표가 선거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확률은 거의 0에 가깝다. 경제학은 합리적인 선택을 통하여 최대의 효용을 강조하는 학문이다. 이에 전문가인 경제학자들은 자신의 행동에 따른 기대값에 부응하여 투표를 하지 않으며 투표하러 가는 것을 비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투표장에서 경제학자들끼리 마주치면 별 수 없이 열혈스러운 아내에게 이끌려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는 일화이다.
 
  어떠한 행위에 대한 기대값은 E(사건) = 사건으로 인한 효용 * 사건이 일어날 확률이다. 수많은 경제학자를 비롯한 사람들이 로또와 같은 복권을 구매하지 않는 이유는 복권의 기대값이 낮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1등을 하기 위해 모든 조합의 번호를 다 써서 모든 등위의 상금을 타려면 814만 장을 사야 하고 그러려면 거금 80억 원이 필요한데 본인한테 돌아오는 것은 40억 원이니 40억 원을 매주 버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은 모두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 그러나 개인의 합리적인 선택이 항상 개인과 사회 전반적으로 합리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유명한 게임이론의 예 중 하나인 죄수의 딜레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Why not change the world? 내가 올해를 마지막으로 졸업한 한동대학교의 슬로건이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확률을 얼마나 될까? 아마 로또에 당첨될 확률보다 높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의 기대값은 현저히 낮다. 혹은 세상의 바꾸는 시도의 실패에 따른 불이익으로 인한 부정적인 효용 때문에 그 기대값은 음이 될 수도 있다. 세상을 바꾸려는 위함부담 없이 순응해서 산다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살 수 있다.(그 기대값이 더 높다.)

  예수님은 어떠한 삶을 사셨을까? 확률 이론 측면에서 본다면 매우 비합리적인 삶을 사셨다. 과연 우리의 이성에 비추어 예수님을 비합리적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우리 인간이 보는 합리성 위에 더 큰 차원의 합리성을 이루신 분이 예수님이다. 세상의 기준의 기대값에 연연하지 않고 예수님의 기준에서 본 높은 기대값을 가진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 비록 그 길이 쉽지 않을 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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